2021년 11월, 8년만에 순천에 왔다.
2021. 11. 3. 22:37 작성

8년 만에 순천에 왔다.
'8년 만에'인 걸까, '또'인걸까. 순천은 이번이 세번째 여행이다. 첫번째는 대학생 때, 두번째는 언니랑 함께, 그리고 오늘.
첫번째 순천 방문은 '오버'였다. 먼저 힘든 내일로 일정 중에 이틀이었고, 순천만을 보고 온 날 술은 많이 마셔서 이튿날 숙취로인해 낙안읍성에 도착한 투어버스에 홀로 쉬는 등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그럼에도 힘겹게 올라간 순천만의 해넘이가 감격스러웠고, 숙취가 해소될 쯤 언뜻 본 낙안읍성과 촬영장은 특별했다. 세곳이 같은 정취를 풍기면서 각각 다른 경관을 보여줘서 한 지역이 맞는 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언니가 갑작스레 순천행 여행을 제안했을 때 거두절미하고 가겠다고 답했다.
두번째 순천 여행은 언니와 언니 친구, 그리고 언니의 게스트하우스 인연들이 함께였다. 깍두기처럼 따라갔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즐기는 여행의 묘미를 그 때 배웠다.(그리고 잊었지)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의 친근한 안내로 정확한 순천만 해넘이 구경과 원주민 맛집의 국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일박이일이라 매우 짧았지만 유쾌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마음껏 구경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순천을 여행하고 싶었다.
2년의 근무를 마무리하고 다시 백수가 된 지 삼일째. 2년의 습관이 남아 9시면 푹 잤다고 눈이 떠졌다. 출근하기 싫어, 퇴근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게 지난 주인데 막상 내일 일어나서 할 게 없다는 게 섭섭했다. 뭘 해야할 지 가늠이 안잡혔다. 뭐하지, 무엇을 해야하지? 월요일은 낮잠을 잤다. 화요일은 집안일을 했다. 그래도 저녁이 오지 않았다. 매일 구경만 하던 넷플릭스를 구경만하고, 봤던 드라마를 다시보며 시간을 흘러보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아도 바람이 통하지 않는 기분, 답답하고 멍한 느낌이 운동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친구들이랑 갈까 고민하던 여행을 그냥 혼자 가볼까, 더 늦으면 추워지고 갈대가 꺾일텐데 그냥 당장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어 놨던 창문에 바람이 훅하고 들어왔다. 기차표를 알아보고, 숙소를 알아보고, 운동 스케쥴을 조정하고. 당장 다음 날 떠나는 여행을 준비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버스 시간표와 맛집을 알아보느라 밤이 깊어졌다.

이번 순천 여행의 컨셉은 무계획, 여행이었다. 당연했다. 당장 다음날 시작될 여행이었고 숙소와 기차표 예약을 마친 게 밤 9시였다. 무엇을 볼 지, 무엇을 먹을 지 하나도 정해진 게 없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무계획이겠구나 생각했고, 어차피 계획할 수 없는 거 하루에 한 곳 정도 보고 오는 여유로운 일정으로 보내자하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도 보러 갈 데가 어디어디 있는 지는 알아봐야지, 혼밥 가능한 식당이 어디어디 있는 지는 알아봐야지, 많이 걸을텐데 옷 한벌은 챙겨야지, 잠옷도 챙겨야지, 숙소에 세면도구 뭐 제공하는지 확인해보고 없는 거 챙겨야지... 무계획은 무슨 벼락치기 계획 여행이 되었다. 맞아요. 저 J에요.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알람 없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기차를 타러 출발했다. 오랜만에 온 기차역은 대우주전쟁의 함선들이 있을 듯 웅장했다.(이 단어 맞나) 기차를 기다리며 두근두근, 기차를 타고서는 벼락치기 계획에 들어갔다. 둘째날에 선암사만 갈까, 낙안읍성도 갈까. 경로가 어떻게 되지, 한 방향 맞나, 버스 시간표를 여기서 보면 되는구나. 식당 알아본 데가 아홉군데나 되네, 이박삼일인데... 서점도 가고 싶어, 독립서점 어디어디 있지? 왜 수요일 쉬는 거야. 앗, 순천만 버스를 안알아봤잖아, 66번 타면 되는구나, 그럼 밥 먹고 바로 가면 첫째날에 순천만 해넘이를 볼 수 있겠네? 어라, 둘째날에 선암사랑 낙안읍성을 가면 독립서점은 언제가지? 7시까지만 운영하는데... 셋째날에도 못가는데... 점점 계획에 여유가 없어졌고 순천에 가까워졌다.

두시간 반의 기차를 탄건지, 지하철 타고 몇정거장 온 건지. 금새 순천에 도착했다. 무계획은 벼락치기 계획으로, 여유는 꽉찬 시간표로 바뀌었다. 원래 계획과 시간표는 바뀌는 거니까. 계획이란 이정표이자 준비일 뿐이니까. 이제 기차에서 내려 여행을 즐겨보자. 그렇게 8년만에 순천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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